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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간식

경북 청송의 껍질깎지 호박떡, 늙은호박을 껍질째 쪄서 빚은 슬로푸드 떡

껍질째 삶아 빚는 시골 떡의 고집

경북 청송의 깊은 산골마을에서는 늙은호박이 단순한 채소 그 이상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농가 마당 한쪽에 누렇게 물든 늙은호박이 줄지어 놓인다. 크고 투박한 그 호박은 외관만 봐도 단단하고 껍질이 두꺼워 보이지만,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껍질까지도 귀한 식재료로 여겨진다. 도시에서는 보기 드문 이곳의 전통 떡, 바로 껍질깎지 호박떡은 호박을 껍질째 삶아 찹쌀가루와 함께 빚는 독특한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경북 청송의 껍질깎지 호박떡

 

이 떡은 보통 호박떡이라 불리는 음식과는 태생부터 다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호박떡은 늙은호박의 속살만 긁어내 찹쌀가루나 밀가루에 섞어 만드는 반면, 청송의 껍질깎지 호박떡은 호박 껍질과 속을 함께 쪄내고, 곱게 으깬 뒤 반죽에 통째로 넣는다. 덕분에 떡의 색은 더 짙고, 풍미는 훨씬 강하다. 껍질 특유의 거친 섬유질이 떡에 고스란히 살아 있어, 씹을수록 구수한 뒷맛이 길게 남는다.

청송의 할머니들은 이 떡을 만들 때 절대 호박 껍질을 벗기지 않는다. 오히려 껍질이 있어야 제맛이라고 한다. 이는 단순히 음식 재료를 아끼는 절약 정신의 표현이 아니라,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전통 조리 철학의 반영이다. 껍질에는 영양소도 풍부하고, 호박의 참맛도 껍질에 배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성된 껍질깎지 호박떡은,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마을 어르신들이 한겨울까지 두고두고 꺼내 먹는 귀한 보양 떡이다.

껍질 속 풍미까지 품은 호박, 떡으로 태어나다

껍질깎지 호박떡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잘 익은 늙은호박을 준비해야 한다. 너무 단단한 상태에서는 껍질이 너무 질겨져 작업이 어렵기 때문에, 서리가 내리기 전 자연숙성된 호박을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 호박을 통째로 찜솥에 쪄내면 껍질도 부드러워지고 속살과 잘 융합된다. 이 과정을 통해 호박 고유의 단맛과 껍질의 쌉쌀한 맛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베이스가 만들어진다.

찐 호박은 껍질을 포함해 곱게 으깬다. 절구로 찧기도 하고, 일부는 손으로 결을 따라 잘게 찢는다. 여기에 찹쌀가루를 섞고, 소금 한 꼬집으로 간을 맞춘다. 설탕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호박 본연의 단맛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 이 지역 조리법의 원칙이다. 떡 반죽은 껍질 조각이 드문드문 보이는 진한 주황빛을 띠며, 모양은 손바닥 크기로 둥글고 납작하게 빚는 경우가 많다.

이 떡의 찜 방식 또한 특별하다. 떡판에 솔잎이나 떡잎 대신 호박잎이나 들깻잎을 깔고 찌는 경우도 있다. 이는 향을 더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떡이 들러붙지 않도록 하기 위한 실용적인 지혜이기도 하다. 떡이 찌는 동안 퍼지는 호박 향은 부엌을 가득 채우며, 그 냄새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따뜻해진다.

익은 떡은 한 김 식힌 뒤, 기호에 따라 검은깨, 콩가루, 조청 등을 곁들이기도 한다. 하지만 전통적으로는 그냥 찐 상태 그대로 먹는 것을 선호한다. 떡 하나를 반으로 갈라 보면, 속에 실처럼 길게 늘어진 껍질 섬유가 보이고, 곳곳에 짙은 호박색과 함께 자연스러운 결이 살아 있다. 이 떡을 먹으면 부드러운 속살과 질긴 껍질이 교차되며, 씹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마침내 입 안 가득 퍼지는 구수함은, 겨울 시골의 고요한 온기를 닮았다.

슬로푸드 정신과 겨울 저장식의 만남

껍질깎지 호박떡은 단순히 옛날식 간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 경북 청송이라는 지역이 지닌 슬로푸드 철학과 연결된 음식이다. 호박은 가을철 한철에 대량 수확되지만, 껍질째 찐 호박떡은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겨울철 저장식으로 활용된다. 찐 떡을 식힌 후 한 장 한 장 랩에 싸서 보관하면,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다시 쪄먹거나 구워 먹을 수 있다.

이러한 저장 방식은 예전 농촌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김장 김치와 함께 겨울 먹거리를 미리 준비하던 시절, 떡 역시 미리 만들어 저장하고 아껴 먹는 귀한 식량이었다. 껍질까지 사용한 호박떡은 영양도 풍부하고, 씹는 맛도 좋아 연로한 어르신들의 겨울 보양식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특히 늙은호박 껍질에는 베타카로틴, 식이섬유, 무기질 등 건강에 좋은 성분이 풍부해, 노인들에게 기력 보충 음식으로 권장되곤 했다.

최근에는 이러한 전통 떡을 체험할 수 있는 슬로푸드 마을 프로그램이 청송에서 운영되기도 한다. 도시 소비자들에게는 이색적인 경험이 되고, 지역 주민들에게는 전통을 잇는 기회가 된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 껍질을 자르고 찧고, 떡을 빚는 과정은 교육적인 효과도 크다. 자연스럽게 ‘버리지 않는 음식’, ‘자연을 있는 그대로 먹는 법’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껍질깎지 호박떡은 화학첨가물 없이 자연 그 자체로만 만든 음식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슬로푸드이자 로컬푸드라 할 수 있다. 외부 재료 없이, 지역에서 자란 재료만으로 한 끼의 간식이 완성되는 이 과정은 음식이 아닌 생활의 철학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껍질까지 안아주는 떡살림의 따뜻한 철학

우리가 껍질깎지 호박떡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단순한 조리법의 독특함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떡이 만들어진 배경, 그 속에 담긴 삶의 방식과 자연에 대한 태도이다. 호박을 껍질째 사용하는 방식은 효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의 모든 것을 거부하지 않고 끌어안겠다는 태도의 표현이다. 이는 곧 농부의 사고방식, 그리고 산골마을이 자연과 함께 살아온 방식과 맞닿아 있다.

껍질을 벗겨내면 보기엔 깔끔할 수 있어도, 그 껍질 속에는 시간이 있고 계절이 있고 흙의 냄새가 있다. 그 모든 것을 담아 찐 떡은 맛도 향도 깊고, 씹을수록 단단한 삶의 미학이 배어 있다. 도시에서는 보통 버려지는 껍질이, 여기에서는 한 조각 떡의 풍미를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것이 바로 음식의 격을 나누는 전통의 힘이다.

이제는 껍질깎지 호박떡을 만드는 사람들이 줄고 있고, 마을에서도 흔하게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이 떡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다시 만들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전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호박 한 통을 통째로 끓이고, 껍질을 찧어 떡을 빚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이자 교육이며 전통의 계승이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는가. 껍질을 깎지 않는다는 단순한 선택이, 자연을 존중하고 삶을 소중히 여기는 방식이라는 걸 껍질깎지 호박떡은 조용히 알려주고 있다. 이 떡은, 시골의 시간과 손맛, 그리고 철학이 살아 숨 쉬는 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