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들머리, 마당에 널린 무청에서 떡이 시작되다
강원도 평창은 겨울이 일찍 시작되는 곳이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농가 마당에는 초록 무청이 수북이 널려 있다. 누구는 그 무청을 베어 묶어 장독 옆에 말려두고, 누구는 삶아 장아찌를 담근다. 그러나 평창 어느 산골 마을에서는 이 무청을 씻고 삶아 찹쌀반죽에 버무려 떡을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무청 찹쌀떡이다.

이 떡은 평범한 듯 보이지만, 찰떡 속을 들여다보면 삶은 무청의 짙은 초록 결이 고르게 퍼져 있다. 처음엔 향긋하면서도 구수하고, 씹을수록 씁쓸한 감칠맛이 난다. 그 맛은 절로 입맛을 조용히 집중하게 만들고, 떡이 아니라 산을 먹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그 어떤 고명이나 잼 없이도 단순한 풍미만으로 오래 여운을 남기는 떡이 바로 무청 찹쌀떡이다.
이 떡은 무말랭이 찹쌀떡과는 전혀 다르다. 무말랭이는 말린 무 뿌리를 활용하지만, 무청 찹쌀떡은 무의 잎과 줄기만을 사용한다. 식감도 향도 완전히 다르다. 무청 찹쌀떡은 말리기 이전의 생잎을 사용하기 때문에 더 섬세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살아 있고, 향긋한 풀내음이 진하게 배어 있다. 이 떡은 소박한 삶의 흔적이며, 자연의 시간을 들여 만든 평창 농가의 떡살림이다.
고랭지 무청과 찰떡의 만남, 조리의 지혜
무청 찹쌀떡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무청은 보통 첫눈이 오기 전 수확한 늦가을 무의 잎 부분이다. 고랭지 무는 뿌리뿐만 아니라 잎도 섬유질이 많고 진한 향을 지니는데, 그 무청을 다듬어 소금물에 살짝 데치면 씁쓸함은 줄고 감칠맛은 살아난다. 이 과정을 통해 먹기 좋은 질감과 향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
삶은 무청은 곱게 다지거나 손으로 쭉쭉 찢은 뒤, 불린 찹쌀가루 반죽에 섞어 안치거나, 반죽 안에 속 재료처럼 넣어 찐다. 전통 방식에서는 시루 바닥에 솔잎을 깔고, 무청 찹쌀떡을 하나하나 손으로 빚어 올리며, 위에도 무청 조각을 고명처럼 얹는다. 일부 마을에서는 들기름이나 참기름에 무청을 먼저 볶아 풍미를 높이는 방식도 사용한다.
찜 과정에서 무청의 향이 김과 함께 퍼지면 마치 시골집 부엌 가득 풀 내음이 번지는 듯한 풍경이 된다. 이 향이 바로 이 떡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무청이 가진 자연적인 쌉쌀함, 볶은 채소 같은 고소함, 그리고 미세한 단맛이 찰떡의 담백함과 겹쳐지며 독특한 조화를 만든다. 맛이 강하지 않으면서도 자꾸 입안에 남는 여운이 깊다.
무청 찹쌀떡의 또 다른 장점은 보존성이다. 따끈할 때 먹어도 좋지만, 식은 후에도 잘 굳지 않고 고유의 식감을 유지한다. 이는 무청에 있는 수분과 섬유질 덕분인데, 덕분에 농사일 중간에 먹는 간식이나, 장거리 이동 시 챙겨가는 음식으로도 활용된다. 예전에는 장터에 갈 때 어머니가 자식 주머니에 하나씩 넣어주던 ‘조용한 사랑의 떡’이기도 했다.
절약과 지혜의 음식, 무청 떡살림의 의미
무청 찹쌀떡은 단지 무청을 활용한 음식이 아니라, 한 마디도 버리지 않던 절약의 정신과 연결된 전통 음식이다. 평창을 비롯한 강원도 고랭지 지역에서는 무의 뿌리는 저장하고 판매에 쓰였고, 무청은 밭머리나 집 뒷마당에서 삶아 식재료로 다양하게 활용됐다. 그 중 가장 널리 쓰인 방식이 바로 떡에 넣는 것이었다. 뿌리와 잎을 모두 쓰는 방식은 가난했지만 지혜로웠던 삶의 방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 떡은 특별한 잔칫날보다는 겨울 초입, 김장 마무리 후 가족들이 모였을 때 자주 등장했다. 농사일이 모두 끝난 뒤, 이웃과 고구마나 무를 나눌 때 함께 만들어 먹던 무청 찹쌀떡은 고생 끝에 오는 평온한 여유의 상징이었다. 특히 겨울 문턱에 이 떡을 해 먹으면 감기나 병이 들지 않는다는 토속 신앙 같은 믿음도 있었다.
무청은 겨울 동안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위를 편하게 해준다는 속설이 있어 어르신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았다. 찰떡 안에 들어간 무청은 부드럽지만 질기지 않고, 씹을수록 깊은 맛이 배어나와 속을 든든히 해준다. 그래서 무청 찹쌀떡은 겨울철 보양 간식으로도 취급되며, 약이 되는 떡으로 기억되곤 했다.
무청 찹쌀떡을 만드는 과정은 대체로 가족 단위로 진행됐으며, 특히 할머니와 손녀가 함께 하는 풍경이 흔했다. 무청을 삶고 다지는 동안 나누는 이야기, 찰떡을 빚으며 손끝에 전해지는 온기, 떡이 익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기다리는 시간은 단순한 조리 그 이상이었다. 이는 세대 간 전통이 전달되는 삶의 교육 현장이기도 했다.
무청 한 줌에 담긴 삶의 겸손함과 떡의 본질
무청 찹쌀떡은 화려하지 않다. 고물이 뿌려진 것도 아니고, 달콤한 소가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떡은 지나온 세월을 품고 있고, 밭의 땀 냄새와 마당의 흙 기운이 배어 있다. 찰떡에 무청을 넣는다는 것은 잎 하나 버리지 않겠다는 삶의 태도이며, 곡식을 아끼고 자연을 존중하던 마음을 담는 일이다.
오늘날에는 무청을 사료로 버리거나 아예 자르지 않고 수확해 버리는 일이 많지만, 예전엔 잎 하나도 귀하게 여겼다. 그 마음이 바로 이 떡 속에 녹아 있다. 무청 찹쌀떡은 그 어떤 잔치 음식보다 겸손하고, 어떤 명절 떡보다 정직하다. 그리고 이 떡을 먹는 순간, 우리는 자연에 빚진 채 살아왔음을 깨닫게 된다.
이제 무청 찹쌀떡을 만드는 집도 줄고, 그 조리법을 아는 어르신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평창과 정선 일부 지역에서는 이 떡을 농촌 체험 프로그램이나 전통 음식 전시회를 통해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항상 ‘아무 것도 버리지 않던 떡살림의 지혜’가 강조된다.
무청 찹쌀떡은 오래 보관하기 위해 만들지 않는다. 그냥 그날 무청이 많아서, 또는 누군가에게 따뜻한 떡 하나 건네고 싶어서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이 떡은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된 음식이며, 먹는 사람에게는 시골의 시간과 마음, 계절의 흐름까지 함께 전해주는 귀한 한 조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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