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이 아니라 뿌리까지 먹던 사람들
해발 1,100m에 위치한 강원도 강릉 안반데기는 평야가 아닌 고지대에 펼쳐진 메밀밭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메밀이 꽃피고 수확되는 시기를 제외하면 이곳의 겨울은 혹독한 추위와 눈으로 가득하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살아가던 산촌 사람들은 식재료를 버릴 줄 몰랐다. 메밀 수확이 끝난 뒤 버려지는 줄기와 뿌리조차도 귀한 먹거리로 여기며, 삶아 말리고, 찧고, 빻아 떡을 빚는 방식으로 재탄생시켰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메밀뿌리 찰떡’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메밀은 국수나 전으로 익숙하지만, 안반데기의 어르신들은 말한다. “진짜 메밀 맛은 뿌리에 있다”고. 이는 메밀 뿌리에 남아 있는 짙은 흙냄새와 특유의 쌉쌀함, 그리고 보글보글 끓일 때 피어오르는 구수한 향 때문이다. 메밀뿌리 찰떡은 이런 깊은 풍미를 그대로 품고 있다. 찰떡 반죽 속에 섞인 메밀뿌리의 섬유질은 씹을수록 고소한 뒷맛을 남기며, 겨울철 몸을 따뜻하게 덥혀주는 음식으로 전해졌다.
안반데기 메밀뿌리 찰떡은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자 슬로푸드 정신의 정수다. 겨울 내내 먹거리가 귀했던 시절, 산촌의 사람들은 남은 것들, 버려질 것들로 따뜻한 떡을 빚었다. 이 떡에는 절약과 생존, 자연에 대한 존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메밀뿌리 손질부터 떡 빚기까지
메밀뿌리 찰떡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수확 후 남은 메밀의 뿌리와 줄기 아랫부분을 모아야 한다. 메밀은 일반 작물에 비해 뿌리가 얕고 가늘기 때문에, 채취 과정에서 손이 많이 간다. 안반데기 어르신들은 메밀 수확이 끝난 뒤 뿌리와 줄기를 갈무리해두었다가, 첫눈이 내리기 전날이나 겨울 초입에 이 떡을 만들었다.
채취한 메밀뿌리는 깨끗이 씻은 뒤 장작불에 올려놓은 가마솥에 넣고 삶는다. 이때 뿌리 특유의 흙냄새가 사라지면서도 메밀의 향은 고스란히 남도록 삶는 시간과 불조절이 중요하다. 충분히 익힌 메밀뿌리는 절구나 맷돌에 넣어 곱게 찧는다. 이 과정에서 섬유질이 부드럽게 풀리면서 떡 반죽에 넣기에 적당한 질감이 만들어진다.
곱게 찧은 메밀뿌리와 찹쌀가루를 섞어 반죽을 만들고, 전통 방식대로 손으로 하나하나 빚어낸다. 특별한 소를 넣지 않고, 반죽 자체에 메밀뿌리 향을 살리는 게 핵심이다. 소금은 약간 넣되, 설탕은 거의 쓰지 않는다. 간혹 메밀의 씁쓸함을 덜기 위해 삶은 팥물을 반죽에 섞기도 했고, 꿀이나 조청에 찍어 먹는 방식도 전해진다.
떡을 찔 때는 참나무 잎이나 솔잎을 깔고 찌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뿌리와 찹쌀의 조합은 찜기 속에서 고르게 퍼지며 구수한 향기를 자아낸다. 쪄낸 떡은 단단하고 밀도감 있는 식감으로, 씹을수록 메밀의 쌉쌀함과 고소함이 교차한다. 산촌 특유의 투박한 손맛과 조리 철학이 떡 안에 그대로 녹아 있다.
산촌 생존 음식이자 슬로푸드의 상징
메밀뿌리 찰떡은 오늘날 보기 드문 음식이다. 그만큼 이 떡은 귀하다. 시장에서도, 유명한 떡집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는 그 까다로운 재료 손질과 긴 조리 시간 때문이다. 하지만 강릉 안반데기처럼 고산지대의 농촌에서는 이 떡이 오래도록 이어져 왔다. 마을 주민들에게는 이 떡이 겨울을 나게 해 준 음식이었고, 어르신들에게는 어릴 적 추억이 배어 있는 간식이었다.
지금은 슬로푸드, 로컬푸드, 제철 음식이 대세가 되었다지만, 안반데기의 메밀뿌리 찰떡은 그런 흐름을 자연스럽게 실천해 온 음식이다. 재료는 지역의 메밀밭에서 직접 나고, 뿌리까지 남김없이 활용하며, 시간이 오래 걸려도 장작불에 정성껏 삶아낸다. 자연과 시간을 존중하는 태도, 그것이 바로 진짜 슬로푸드의 정신이 아니겠는가.
무엇보다도 이 떡은 한철의 추억을 품고 있다. 첫눈이 내리던 날, 마을 아이들이 가마솥 옆에 모여 떡이 익기를 기다리던 모습, 떡 하나를 조청에 찍어 입에 물던 장면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풍경이다. 이 떡은 식사도 아니고 단순한 간식도 아니다. 그것은 겨울이라는 계절 속에서 버텨낸 산촌의 기억이고, 사람들의 지혜이며, 전통의 결정체다.
사라진 떡, 되살려야 할 맛
오늘날 강릉 안반데기에도 메밀뿌리 찰떡을 만드는 가구는 손에 꼽힌다. 도시의 삶이 보편화되고, 간편한 조리 방식이 대세가 되면서 이러한 슬로푸드 떡은 점점 잊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떡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맛 때문만은 아니다. 메밀뿌리 찰떡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던 방식의 상징이자, 농부의 철학이 녹아 있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이 떡은 화려하지 않다. 고운 색도 없고, 특별한 소도 없다. 하지만 그 안에는 메밀이라는 작물을 끝까지 활용하는 절약 정신,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조리 철학, 겨울을 나기 위한 생존 전략이 모두 담겨 있다. 이러한 떡 하나하나가 모여 지역의 음식 문화가 되고, 전통이 되는 것이다.
앞으로 메밀뿌리 찰떡은 단순한 지역 간식이 아니라, 교육과 체험, 농촌관광의 핵심 자산으로 활용될 수 있다. 강릉 안반데기에서는 이를 다시 복원하려는 움직임도 조심스레 일어나고 있다. 농한기를 활용해 떡을 만들고, 지역축제나 학교 교육 프로그램에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말이다.
사라져가는 전통음식 속에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시간이 담겨 있다. 메밀뿌리 찰떡은 그 대표적인 예다. 이 떡이 가진 소박한 맛, 손이 많이 가는 조리 과정, 겨울이라는 계절과의 연결성은 오히려 오늘날 가장 귀한 가치로 재조명받을 수 있다. 우리는 이 떡을 먹으며, 단순한 배 채움이 아닌 삶을 이해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메밀뿌리 찰떡을 오늘날 어떻게 다시 살릴 수 있을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떡을 만드는 전통 방식을 제대로 기록하고, 후대에게 전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마을 어르신들의 손맛을 단순히 전시나 체험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 떡이 판매되고 소비될 수 있는 지역 먹거리 상품화 전략으로 연결해야 한다. 특히 웰빙과 슬로푸드 트렌드에 관심이 높은 젊은 세대에게 ‘메밀뿌리’라는 희소하고 건강한 재료는 분명한 매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메밀을 단순한 곡물이 아닌 뿌리부터 꽃까지 전부 활용하는 자원 순환형 농산물로 인식시키는 일도 중요하다. 지금까지 떡 산업에서 주목받지 못한 메밀뿌리를 활용한 제품이 등장한다면, 지역 농업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 실제로 강원도 산촌 일부에서는 이를 간식으로만 두지 않고, 건강 보조식품이나 시리얼 소재로 개발하려는 움직임도 생겨나고 있다.
작고 투박한 떡 하나가, 사실은 계절과 노동, 기억, 자연과의 관계까지 담고 있다는 사실. 메밀뿌리 찰떡은 그것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다. 우리가 이 떡을 단순한 먹거리로 보지 않고, 살아 있는 유산이자 이야기로 간직한다면, 언젠가는 이 떡이 또다시 겨울 어느 날, 누군가의 기억 속 따뜻한 향기로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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