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박 속살로 떡을 빚던 기억
겨울이 깊어질수록 전북 무주의 산골 마을은 더욱 고요해진다. 하얀 눈이 밭과 지붕을 덮고 나면, 사람들은 비로소 한 해의 수고를 정리하고 다음 해의 준비를 시작한다. 무주의 겨울은 길고 깊다. 그래서 이 지역의 사람들은 겨울 식량을 지혜롭게 준비해왔다. 박속 찰떡은 그 지혜 중 하나였다. 겉껍질이 단단하게 굳은 늙은박은 겨울 음식의 단골 재료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부드러운 속살은 떡으로 재탄생하곤 했다.
‘박속 찰떡’은 시장이나 대중적인 떡집에선 찾아보기 힘든, 말 그대로 산속 마을에서 전해지는 전통 음식이다. 무주의 고지대에 위치한 몇몇 마을에서는 지금도 설 무렵이면 박속을 다듬고 찰떡을 찌는 풍경이 이어진다. 박의 속살은 수분이 많고 섬유질이 부드러워, 반죽에 넣으면 은근한 단맛과 고소한 풍미가 더해진다. 설탕이나 조청 없이도 박 자체의 맛으로 충분했던 이 떡은, 무심한 듯 소박하지만 오랜 시간을 견뎌온 생명력 있는 음식이었다.
이 떡의 기원은 절약과 생존에 있다. 장아찌를 담그기 위해 박을 손질하면, 많은 양의 속살이 남게 된다. 예전에는 그걸 버리지 않았다. 속살을 살짝 삶아 찹쌀가루에 섞고, 들기름 바른 대나무 시루에 쪄내면 구수하면서도 단맛이 배어 있는 박속 찰떡이 완성되었다. 특별한 조미료 없이도 충분한 이 맛은, 그 시대 사람들의 손맛과 음식 철학을 보여준다.
박속 찰떡의 재료와 만드는 법
박속 찰떡을 만들기 위해선 반드시 '잘 익은 늙은박'이 필요하다. 겉은 딱딱하고 껍질에는 흠집이 많지만, 안쪽 속살은 부드럽고 단맛이 살아 있다. 박은 보통 장아찌나 나박김치를 담글 때 많이 사용되는데, 이 과정에서 남는 속살을 활용하는 것이 바로 박속 찰떡의 출발점이다.
우선 박속은 깨끗이 손질해서 잘게 썬 뒤, 은근한 불에 푹 삶아야 한다. 삶는 과정에서 섬유질이 연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단맛이 우러나오고, 특유의 푸른내가 줄어든다. 삶은 박은 물기를 짜서 찹쌀가루와 함께 반죽에 섞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박의 비율이다. 박이 너무 많으면 떡이 질어지고, 너무 적으면 향과 단맛이 살지 않는다. 마을 어르신들은 이 비율을 손끝 감각으로 조절했다.
반죽을 마무리하면, 대나무 찜기에 솔잎이나 깨끗한 천을 깔고 떡을 올린다. 솔잎은 향도 더해주지만, 박의 수분이 배어 찜기 바닥에 들러붙는 것을 막아준다. 찌는 시간은 대략 40~50분. 뚜껑을 열었을 때 퍼지는 박의 은은한 향과 찰떡 특유의 고소함이 어우러지면, 박속 찰떡은 완성된다.
속재료는 따로 넣지 않는다. 박의 자연 단맛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다만 간혹 흑임자나 팥고물을 겉에 뿌리거나, 들기름을 약간 발라 풍미를 더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박의 풍미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최소한으로 이뤄졌다.
절약의 철학이 담긴 겨울 간식
박속 찰떡은 단지 음식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바로 절약과 재활용의 철학이다. 박은 예부터 다목적 재료였다. 껍질은 말려 그릇으로 쓰고, 속은 국거리나 장아찌, 나박김치, 그리고 떡의 재료로 활용되었다. 버릴 것이 없었다. 특히 겨울에는 먹을거리가 귀했던 탓에, 박의 속살조차도 귀하게 여겨졌다.
이 떡은 단맛이 강하지 않아, 어르신들뿐 아니라 어린아이들도 소화하기 쉬운 겨울 간식이었다. 설탕 대신 박의 단맛으로 맛을 낸다는 점에서, 현대의 ‘무가당 디저트’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최근 건강한 재료를 찾는 소비자들이 늘면서, 이런 전통 방식이 다시 조명받고 있다.
무주의 산골에서는 박속 찰떡이 마을 공동체 음식이기도 했다. 떡을 찔 때는 이웃들이 모여 함께 만들고, 나눠 먹으며 정을 나눴다. 특히 명절이나 제사, 또는 동지 즈음이면 이 떡을 찌는 풍경이 마을 여기저기에서 펼쳐졌다고 한다. 삶은 박속을 담은 바구니들이 마루에 줄지어 놓이고, 찹쌀가루를 덜어 내고 반죽을 하던 그 장면은 이제는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이 떡은 조청이나 꿀에 찍어 먹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먹었다. 박 자체의 은근한 단맛이 있어서 별다른 양념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소박하고 담백한 맛이야말로 박속 찰떡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되살려야 할 슬로푸드의 가치
오늘날 박속 찰떡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역을 벗어나면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이 음식은, 지금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떡을 되살려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것은 단순한 옛날 음식이 아니라, 한 세대의 지혜와 공동체의 가치, 그리고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간 삶의 방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최근 슬로푸드와 로컬푸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박속 찰떡도 조용히 재조명받고 있다. 무주 지역 일부 체험 마을에서는 이 떡을 계절 간식으로 복원하고, 아이들과 함께 만드는 체험 프로그램으로 운영 중이다. 재료의 순수성과 조리 방식의 전통성, 그리고 환경을 배려한 순환 구조는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음식 철학과 맞닿아 있다.
박속 찰떡은 맛도 좋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속에 담긴 시간의 깊이와 사람들의 마음이다. 누구나 먹을 수 있지만, 아무나 만들 수 없는 떡. 그것이 박속 찰떡이 가진 진짜 가치다. 앞으로 이 떡이 현대적인 방식으로 복원되고, 다양한 형태로 계승된다면, 단순한 전통을 넘어 지역문화의 상징적인 콘텐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소박한 떡 한 조각을 통해 겨울 산골의 따뜻함과 공동체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그 속에는 먹는다는 행위를 넘어, 살아가는 태도와 기억해야 할 지혜가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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