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귤이 과일 그 이상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제주도에서 감귤은 단지 겨울철 과일이 아니라, 삶과 문화, 그리고 생계의 일부였다. 한라산 남동 사면, 특히 해발 300미터 이하의 완만한 지대에서 자란 감귤은 당도가 높고 껍질이 얇아 예부터 귀한 대접을 받았다. 지금은 감귤을 손쉽게 마트에서 구입할 수 있지만,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감귤은 서울에 보내는 선물용 과일이자, 제주 사람들의 소득을 책임지는 전략 작물이었다.
한라산 자락에서 자란 감귤로는 단지 생과로만 소비되지 않았다. 이 과일은 오래 저장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제주 여성들은 감귤을 오래 두고 먹기 위한 다양한 가공 방법을 고안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감귤을 이용한 전통 과자들이었다. 감귤정과, 귤말랭이, 감귤떡, 감귤엿 등은 단순한 간식을 넘어 제주도의 계절성과 생활양식을 반영하는 음식 문화였다.
이 글에서는 한라산 밑에서 자란 귤이 어떻게 전통 과자로 가공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문화적 맥락이 있었는지, 그리고 오늘날 제주 특산품으로 다시 떠오르는 감귤 과자의 현재까지 상세히 살펴본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지역 간식의 이야기를 넘어서, 자연환경이 어떻게 식문화를 결정하고, 한 지역의 정체성을 형성해나갔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감귤을 말리고 졸이고 빚었던 제주 여성들의 손
감귤 과자의 시초는 '귤정과'였다. 귤정과는 감귤 껍질을 얇게 벗겨 설탕이나 조청에 절여 만든 일종의 절임 간식이다. 껍질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폐기물을 줄이는 지혜가 느껴지고, 향이 진한 감귤 껍질 특유의 쌉쌀한 맛이 단맛과 어우러지며 매력적인 풍미를 낸다. 귤정과는 주로 명절이나 귀한 손님 접대용으로 쓰였으며, 꿀과 생강을 함께 졸이기도 했다.
또 다른 전통 과자는 '감귤엿'이다. 감귤즙을 졸이고 찹쌀풀을 넣어 만든 이 엿은 특유의 신맛과 단맛이 어우러져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맛을 냈다. 조선시대 제주 목사들의 보고서에도 귤엿이 언급된 기록이 있을 정도로, 이는 오랜 전통을 가진 제주식 간식이었다. 감귤엿은 특히 어린이들이 감기 예방용으로 먹기도 했고, 학교 도시락에 소량 싸가는 경우도 있었다.
감귤떡도 중요한 전통 과자 중 하나였다. 찹쌀가루 반죽에 감귤즙을 넣고, 삶거나 쪄서 만든 이 떡은 가을 수확철 이후 여성들이 공동으로 작업해 만들곤 했다. 한라산 자락 마을에서는 이를 '귤떡'이라 불렀고, 껍질을 살짝 채 썰어 넣거나, 껍질을 가루로 내어 반죽에 섞는 방식으로 향을 더했다. 감귤떡은 한 해의 수확을 기념하거나, 출산을 축하하는 잔치에서 자주 등장했다.
이 모든 감귤 과자들은 마당에서 감귤을 다듬는 할머니들, 조청을 끓이는 어머니들, 그리고 이 맛을 훔쳐보는 아이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다. 전통 과자는 단지 요리법의 산물이 아니라, 그 시대 여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생활문화의 집합체였다.
한라산 아래에서만 만들 수 있었던 이유
제주 감귤 과자가 제주 외 지역과 가장 크게 다른 이유는 기후와 감귤 품종 때문이다. 한라산 남사면은 따뜻한 남풍이 불고 일조량이 풍부해 감귤이 가장 맛있게 익는 지대로 꼽힌다. 특히 이 지역에서 자란 감귤은 껍질이 얇고 즙이 풍부하여 과자로 만들었을 때 향이 강하고 색이 선명하게 살아난다. 같은 감귤이라도 기후가 다르면 맛과 향이 현저히 달라지기 때문에, 제주 여성들은 이 특별한 자연환경을 활용해 자신들만의 가공 방식을 만들었다.
감귤 과자를 만드는 데에는 일정한 온도와 습도도 필요했다. 특히 겨울철 제주 바람은 습하지 않고 건조하여 감귤껍질을 빠르게 말릴 수 있었고, 이 덕분에 정과나 말랭이를 쉽게 만들 수 있었다. 본토에서는 가공 과정 중 곰팡이가 생기거나 색이 바래기 쉬웠던 반면, 제주에서는 자연 건조만으로도 일정한 품질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제주 지역은 교통이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주 여성들은 가공을 통해 귤을 오래 보존할 필요가 있었다. 감귤을 전통 과자로 가공하는 행위는 단순한 음식 만들기를 넘어서 생존 전략이었다. 감귤은 장에 내다 팔기도 했고, 육지로 보내는 선물로도 활용됐다. 이러한 유통 구조 덕분에 감귤 과자는 지역 경제에도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순전히 지역 기후와 지형, 품종, 생활조건이 어우러졌을 때만 만들어질 수 있었던 감귤 과자는 제주 고유의 식문화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이 음식은 자연을 읽는 능력과 생활의 지혜가 결합된 결과였다.
감귤 과자, 전통에서 브랜드로 진화할 수 있을까
오늘날 제주에서는 감귤 과자를 재해석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감귤 정과는 고급 한과 선물세트에 포함되며, 감귤잼이나 감귤칩, 감귤 젤리로 형태를 바꿔 현대적인 제품으로 탄생하고 있다. 제주공항 면세점이나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제주 감귤을 원재료로 한 프리미엄 간식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옛 방식으로 만들어진 감귤 과자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감귤 과자의 진정한 매력은 그것이 단순한 과자에 머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제주 여성들의 손끝에서 만들어지고, 계절의 흐름에 따라 생산되며, 이웃과 나눠먹는 공동체 문화 속에서 소비되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감귤 과자는 단지 먹거리가 아니라, 전통과 자연이 만나는 접점이자, 지역적 정체성을 담은 하나의 이야기이다.
앞으로 제주 감귤 과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단지 상품으로서의 가치만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문화적 서사를 함께 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감귤로 만든 정과 한 조각에도 그 땅의 바람과 햇살, 그리고 손으로 일구어낸 사람들의 노고가 담겨 있다. 우리는 그 맛을 통해 제주를 기억하고, 더 나아가 그 문화를 이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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