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한 들깨 냄새로 채워지던 부엌, 그 강정의 기억
어릴 적 명절이나 잔칫날이 다가오면 부엌 한구석에서는 들깨를 볶는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커다란 놋그릇 안에서 들깨와 조청이 섞이며 부드럽게 버무려질 때, 기다리던 가족들의 눈빛은 설렘으로 반짝였다.
들깨강정은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손맛과 계절의 정서를 함께 담아낸 전통 음식이었다. 특히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에서는 명절 음식의 일부이자 마을 대소사에서 빠질 수 없는 상징적인 음식이었다.
강정은 원래 쌀튀밥, 깨, 콩 등을 조청으로 굳혀 만든 전통 간식의 한 종류이다. 그중에서도 ‘들깨강정’은 고소함과 영양성분이 풍부하다는 이유로 어르신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들깨는 특유의 향 때문에 어린이들이 쉽게 좋아하진 않았지만, 어른들에겐 입안에서 퍼지는 고소한 맛과 조청의 단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어른의 간식’이었다.
이 글에서는 들깨강정이 어떻게 탄생했고, 왜 지역마다 그 만드는 방식이 다른지,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이 전통 간식을 어떻게 계승하거나 재해석할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 간단해 보이지만 절대 간단하지 않은, 들깨강정의 깊고 진한 이야기를 담아보려 한다.
들깨강정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들깨강정의 핵심은 당연히 ‘들깨’다. 들깨는 참깨보다 향이 강하고 기름기가 많아 볶는 데 주의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들깨를 마른 팬에 약불로 볶은 뒤, 체에 밭아 이물질을 제거하고, 절구나 믹서로 살짝 부숴 사용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들깨를 너무 곱게 갈면 기름이 빠져나와 강정이 눅눅해진다는 것이다. 적당한 질감이 유지돼야 조청과 잘 섞이고, 고소한 맛도 살아난다.
전통적인 방식에서는 조청을 따로 졸여 만든다. 쌀을 삭혀 엿기름으로 당화시킨 후, 끓여서 만든 수제 조청은 시중 제품보다 향과 점성이 풍부해 강정을 만들기 좋은 조건을 갖췄다. 조청이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들깨를 천천히 부어가며 나무 주걱으로 고르게 섞는다. 이 과정은 온도 조절이 매우 중요하다. 조청이 너무 뜨거우면 들깨가 눅눅해지고, 너무 식으면 굳어버려서 섞을 수 없다.
버무린 들깨와 조청은 넓은 평판에 얇게 펼쳐 손으로 눌러 굳히고, 어느 정도 식은 후 칼이나 가위로 정사각형 모양으로 잘라낸다. 이때 굳는 속도와 주변 온도에 따라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그 투박함이 오히려 ‘집에서 만든 간식’이라는 느낌을 더해준다. 일부 가정에서는 들깨 외에도 땅콩, 해바라기씨, 검정콩 등을 함께 섞어 풍미를 다양화하기도 했다.
지방마다 다른 들깨강정의 얼굴
지역별로 들깨강정의 형태와 성분, 사용하는 조청의 종류도 조금씩 달랐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들깨 외에 참깨와 깨소금을 함께 섞는 경우가 많았고, 조청 대신 엿기름을 졸인 ‘엿물’을 쓰는 집도 있었다. 덕분에 들깨강정이 살짝 물렁하면서도 탄력 있는 식감을 지녔다. 고소함보다는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강조되는 방식이었다.
반면 경상도 지역에서는 들깨를 훨씬 고소하게 볶아 진하게 내는 맛이 특징이었다. 기름진 느낌을 줄이기 위해, 볶은 들깨에 약간의 고춧가루나 생강가루를 넣는 레시피도 일부 존재했다. 이 때문에 경상도의 들깨강정은 약간 매콤하면서도 짭조름한 풍미가 살아 있어 술안주로도 애용되었다. ‘강정은 달기만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는 지역적 특색이 드러난다.
충청도에서는 가장 전통적인 형태의 들깨강정을 고수했다. 들깨와 수제 조청만으로 만든 강정은 딱딱하면서도 씹을수록 단맛과 고소함이 배어나오는 형태였고, 일부 마을에서는 이 강정을 제사상에 올리는 정식 음식으로도 사용했다. 들깨는 번식력이 좋아 집 주변에 심어 두고 자급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강정 역시 ‘집에서 만든 먹거리’라는 인식이 강했다.
고소함 속에 담긴 전통의 기술과 계승의 방향
들깨강정은 단순히 ‘견과류에 조청을 입힌 간식’이 아니다. 그것은 들깨를 키우고, 말리고, 볶고, 손수 조청을 만드는 과정을 거쳐야만 만들어지는 손맛의 정수이자, 여성들의 부엌 노동과 계절의 리듬이 함께 담긴 전통음식이다.
오늘날에는 들깨강정을 대형마트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프랜차이즈 제과점에서도 가끔 보이지만, 대부분은 기계로 찍어낸 균일한 맛의 제품이다. 반면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든 들깨강정은 하나하나 크기도 다르고, 맛도 미묘하게 다르다. 손으로 만들어야만 나오는 ‘조청과 들깨의 응집력’이 있고,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 주는 무게감이 있다.
일부 농촌 마을에서는 마을 어르신들의 기술을 전수하기 위한 ‘들깨강정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또 건강 먹거리 트렌드에 힘입어, 저당 조청·들기름 코팅·비건 레시피 버전의 강정도 등장하고 있다. 들깨는 식이섬유, 오메가3, 칼슘이 풍부해 웰빙 간식으로도 손색이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강정을 단순히 간식이 아닌 세대를 잇는 문화로 바라보는 태도다.
들깨강정은 할머니의 손끝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맛과 정성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승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다시 들깨강정을 꺼내는 이유는, 고소한 간식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잊히는 전통을 다시 손에 쥐기 위해서다.
들깨라는 작물의 특성과 강정으로 이어지는 전통
들깨는 한국의 기후에 적합한 대표적인 자급 작물 중 하나였다. 특히 중부 내륙지방, 그중에서도 충청도, 강원도 일부, 경북 북부 지역에서는 들깨가 논보다 밭에서 더 가치 있는 작물로 여겨졌다. 들깨는 비료가 많이 필요하지 않고, 수확량도 높지 않지만, 소량만으로도 고소한 기름과 강한 향을 내기 때문에 ‘가치 있는 작물’로 불렸다.
가을이 되면 들깨는 잎이 누렇게 마르고, 꼬투리가 바삭해지기 시작한다. 들깨 수확은 손으로 하나하나 털어내는 작업으로, 여성들이 주로 담당했다. 강정은 보통 이 시기 이후에 만들어졌다. 들깨를 충분히 말려야 볶았을 때 눅눅하지 않고, 기름이 적절히 배어나오기 때문이다. 이처럼 계절의 흐름과 강정의 탄생 시기는 명확히 연결되어 있었고, 겨울철 저장식으로 적합하다는 점에서 집집마다 들깨강정은 '겨울 손님 간식'으로 준비되곤 했다.
또한 들깨강정은 단순한 간식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일부 지역에서는 설날이나 정월대보름 제사상에 들깨강정을 올렸다. 특히 강정 중에서도 들깨만으로 만든 강정은 ‘정직한 간식’으로 여겨져, 신에게 올리기 적합하다고 믿는 이들도 있었다. 설화에 따르면, 강정은 ‘단단하고 부서지지 않아 가족의 화목과 장수를 상징’한다고도 전해졌다.
최근 몇몇 지역에서는 들깨강정을 현대화해 상품화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예를 들어, 고급 선물세트로 포장하거나, 유기농 조청과 국산 들깨만 사용한 수제 강정을 백화점에서 판매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도들은 늘 성공적이진 않았다. 그 이유는 들깨 특유의 ‘고소한 기름 향’이 젊은 소비자에게는 종종 이질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들깨기름 냄새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에게는, 고급화된 제품이 오히려 ‘무거운 맛’으로 다가간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들깨강정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는 그 자체의 맛을 강요하기보다,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해주는 가교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시리얼 형태나 건강 바 형태, 혹은 유자청과 함께 먹는 조합 같은 새로운 레시피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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