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어귀를 지나면 들려오던 강정 깨지는 소리
순천의 오래된 장터를 거닐다 보면, 매주 목요일마다 열리는 5일장 날의 활기를 쉽게 체감할 수 있다. 싱싱한 생선이 오가는 수산 좌판 옆, 구수한 곡물 냄새가 풍기는 곡물가게 사이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곳이 있다. 바로 깨강정을 만드는 강정집이다. 이곳은 이미 반세기 가까이 자리를 지켜온 곳으로, 장터에서 강정 냄새와 바삭한 소리로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많은 이들에게 강정은 단순한 과자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유년 시절의 추억, 설 명절에 선물로 받았던 기억, 혹은 장터에서 어머니 손을 잡고 지나가던 풍경과 맞닿아 있다. 특히 순천 지역에서는 깨강정을 ‘시장표 간식’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동네 어르신들에게는 추억의 맛이며, 젊은 세대에게는 색다른 전통 먹거리로 다가온다.
깨강정은 전통 과자 중에서도 비교적 만들기 쉬워 보이지만, 맛의 깊이를 만들기 위해선 시간과 기술, 그리고 장인의 감각이 필요하다. 순천 장터의 깨강정은 이 모든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었기에,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는 맛으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아왔다. 이 글에서는 순천 장터에서 시작된 깨강정의 역사와 전통, 만드는 방식,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명해본다.
깨강정의 재료와 장터식 조리 방식
깨강정의 주재료는 말 그대로 ‘깨’다. 대부분 흰깨를 사용하지만, 일부는 검정깨나 흑임자를 섞어 쓰기도 한다. 깨는 고소한 맛을 내기 위해 볶는 과정이 중요한데, 불 조절이 미묘하게 어렵다. 너무 센 불에 볶으면 향이 날아가고, 약하면 기름이 배어나오지 않아 고소함이 떨어진다. 순천 장터의 오래된 강정집은 이 볶는 과정에 특히 정성을 들인다.
볶은 깨는 미리 졸여둔 조청이나 설탕물에 버무려지는데, 이때도 타이밍이 관건이다. 조청이 끓기 시작할 때 바로 깨를 넣어야 하고, 단맛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 장인들은 조청 대신 사탕수수를 졸인 물엿을 사용하기도 한다. 순천의 방식은 전라도 특유의 ‘은근하고 진한 단맛’을 살리기 위한 조리법이 특징이다.
버무려진 깨 혼합물은 얇게 펴서 틀에 넣은 뒤, 나무 밀대로 눌러 모양을 잡는다. 다진 땅콩이나 아몬드를 얹기도 하고, 콩가루를 뿌려 마무리하기도 한다. 장터에서는 이 과정을 빠르게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손놀림이 매우 빠르다. 바삭하게 굳힌 후 일정한 크기로 잘라내면 깨강정 특유의 바삭하고 고소한 식감이 완성된다.
순천 장터 강정집의 특징은 ‘즉석 제조’에 있다. 주문이 들어오면 바로 조청을 끓이고 깨를 볶아 만드는 시스템은 대량생산 제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신선함을 제공한다. 조리 중간에 들려오는 ‘탁탁’ 깨지는 소리는 장터를 지나는 사람들의 귀를 자극했고, 맛보기 한 조각에 지나가던 손님이 발길을 멈추는 장면은 이곳의 일상이었다.
깨강정에 담긴 장터의 정서와 세대 간의 기억
깨강정은 순천 장터를 상징하는 음식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노점에서 만들어진 이 전통 과자는 단지 간식이 아니라, 시장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흐르는 세대 간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해왔다. 어린 시절, 장터에 오면 깨강정을 사달라며 떼쓰던 아이가 어느덧 부모가 되어 다시 아이의 손을 잡고 장터를 찾는다. 그 아이는 또 그 맛을 기억하게 되고, 이렇게 깨강정은 오랜 시간 동안 세대를 건너며 이어졌다.
이 강정은 특별한 포장도 없고, 유통기한도 짧지만, 오히려 그 점이 강점으로 작용한다. 사람들은 깨강정을 통해 ‘지금 만들고 지금 먹는 음식’이라는 신뢰를 느낀다. 포장지 너머의 브랜드가 아닌, 만드는 사람의 얼굴과 솥 안의 열기까지 모두 느낄 수 있는 음식, 그것이 바로 순천 장터의 깨강정이다.
순천뿐 아니라 전라남도 고흥, 여수, 광양 등지에서도 장터마다 강정을 파는 노점이 있었다. 다만 순천이 강정으로 유명해진 데에는, 장인의 기술과 함께 ‘사람들이 다시 찾는 이유’가 있었다. 단순히 맛이 좋아서라기보다는, 그 강정 안에 담긴 추억, 손맛, 그리고 장터의 분위기가 함께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강정은 사라지는 음식이 아니라 다시 피어나는 기억이다
최근에는 깨강정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건강식으로 재해석되어 견과류와 섞인 고급 수제 강정으로 출시되기도 하고, 백화점 선물세트로도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본래의 의미는 점차 흐려지고 있다. 마치 복고 패션을 소비하듯, 표면만 따라 한 제품들이 진짜 장터 강정의 감동을 담기엔 부족하다.
깨강정은 단지 단맛을 내는 과자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현장에서 만들어지고, 사람 사이에서 건네지는 따뜻한 손맛이다. 순천 장터의 깨강정이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맛이 단순히 맛있어서가 아니라, 그 맛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다시 전통 간식을 이야기할 때, 깨강정은 단지 ‘옛날 간식’이 아니라, 지역성과 공동체성이 녹아든 살아 있는 전통으로 봐야 한다.
지금도 순천 장터의 한켠에서는 깨강정 냄새가 퍼지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도 그 향을 따라 발걸음을 멈추게 될지도 모른다. 그 순간, 이 간식은 다시 당신의 기억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순천 깨강정이 지닌 전통의 가치와 현대적 가능성
순천 장터의 깨강정은 여전히 살아 있는 유산이다. 그것은 단순한 먹거리를 넘어서는, 지역 정체성과 공동체 정서를 담고 있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러나 빠르게 변화하는 유통 구조와 소비 트렌드 속에서 이런 전통 간식이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플라스틱 포장지에 깔끔하게 담긴 공장식 강정과는 달리, 순천 장터의 깨강정은 모양이 제각각이고 보관 기간도 짧지만, 그 투박함이 오히려 이 간식의 진정성을 증명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런 전통 간식을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살리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순천의 강정집이 가지고 있는 레시피와 제작 방식을 지역문화자산으로 등록하고, 장터를 기반으로 한 체험 프로그램이나 관광 코스로 개발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몇몇 지자체에서는 장터의 강정 만들기를 포함한 ‘시장 음식 문화 체험’을 관광 상품화하고 있으며, 그 반응도 나쁘지 않다. 순천의 경우에도 깨강정을 활용한 시식 프로그램이나, 지역 초등학교와 연계한 음식문화 교육을 통해 새로운 세대에게 이 간식을 소개할 수 있다.
더불어 요즘처럼 건강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시점에서는 깨강정이 가진 식재료의 가치도 주목할 만하다. 볶은 깨는 항산화 효과가 뛰어나고, 조청이나 물엿은 정제 설탕보다 당지수가 낮아 상대적으로 건강한 감미료로 분류된다. 이를 기반으로, 설탕을 최소화하거나 현미, 견과류 등을 혼합한 현대적 레시피를 개발한다면 깨강정은 건강 간식으로도 충분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전통은 결코 박물관 속 유물처럼 보존되어야 할 대상만은 아니다. 그것이 삶 속에서 사용되고, 다음 세대에게 자연스럽게 전달될 수 있어야 진짜 의미를 가진다. 순천 장터의 깨강정은 단지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지금도 누군가의 손에서 만들어지고 누군가의 입속으로 들어가며 이어지고 있다. 그 안에는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이 있다. 그 울림은 우리가 이 전통 간식을 단지 옛날 음식이 아닌, 앞으로도 계속 먹고 나눌 수 있는 살아 있는 문화로 인식해야 할 이유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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