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랭이가 되기 전, 고구마는 삶고 찧고 말려야 했다
고구마말랭이는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건강 간식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간편하고 오래 보관할 수 있으며, 자연의 단맛만으로 충분한 풍미를 지닌 식품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전자동 건조기로 고구마를 말려 소비하는 방식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충청도의 가을 농촌에서는 고구마를 ‘말랭이’로 가공하는 것이 아니라, 푹 삶고, 찧어 반죽을 만들고, 다시 말려 가루나 덩어리 간식으로 재가공하는 일이 일상이었다.
충청도는 고구마 주산지는 아니지만, 비교적 온화한 내륙 기후 덕분에 고구마 재배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음력 9월 중순부터 10월까지는 ‘고구마 캐는 철’로 불렸고, 이 시기 농가에서는 하루에도 몇 짐씩 고구마를 캐내 널어놓았다. 고구마는 그 자리에서 삶아먹거나 굽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목적은 ‘겨울 간식과 구황식 저장’이었다. 오늘날처럼 냉장고나 냉동고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고구마는 말려야 했고, 그 말리는 방식은 단순 건조가 아닌, ‘찐 후 찧어서 말리는’ 복합 과정이었다.
이 글에서는 고구마말랭이가 상업화되기 전, 충청도 농촌에서 가을마다 만들어졌던 고구마 간식의 종류, 만드는 방법, 보관 방식,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생활의 지혜를 깊이 있게 살펴본다. ‘말랭이’라는 단어의 진짜 의미부터, 지금은 잊힌 고구마 간식의 다양한 형태까지, 이 글은 당신의 기억을 되살릴지도 모른다.
충청도식 고구마 간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충청도 농가에서는 고구마 수확 직후, 가장 먼저 ‘물고구마’를 솥에 넣고 푹 삶았다. 이후 삶은 고구마는 껍질을 벗긴 뒤, 맷돌이나 절구를 사용해 완전히 찧거나 으깼다. 이때 중요한 건 고구마의 점도였다. 수분이 많은 고구마는 말릴 수 없기 때문에, 삶은 뒤에도 다시 걸쭉하게 물기를 조절했다. 찧은 고구마는 둥글납작한 모양으로 빚거나, 길쭉한 막대 모양으로 만들고, 대나무 발 위에 얹어 그늘에서 며칠간 말렸다.
이렇게 만들어진 간식을 지역에서는 ‘고구마 굳이’, ‘고구마 떡마름’, 혹은 ‘고마떡’이라 부르기도 했다. 충청남도 예산이나 홍성 지역에서는 고구마 반죽에 소금을 약간 넣어 단맛을 더 강조하기도 했고, 일부 가정에서는 고구마 반죽 속에 콩가루나 참깨, 삶은 팥을 섞어 영양을 보완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고구마말랭이와 다른 점은, 그 식감과 보관 목적에 있다. 지금의 말랭이가 쫄깃하고 달콤한 식감이라면, 과거의 고구마 간식은 단단하고 묵직했으며, 겨우내 차나 술과 곁들이는 저장식품이었다.
또한 일부 농가에서는 이 말린 고구마 반죽을 다시 빻아 ‘고구마 가루’를 만들고, 이것을 떡 반죽이나 수제국수 반죽에 섞어 사용했다. 고구마는 밀가루보다 싸고, 농가에서 직접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에 탄수화물 대체재로도 활용되었다. 아이들은 이 굳이 말린 고구마 간식을 얇게 썰어 숯불에 살짝 구워 먹었고, 이는 지금의 스낵류보다 훨씬 담백하고 건강한 맛이었다.
말랭이가 등장하면서 사라진 고구마 간식들
현대의 고구마말랭이는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대량 생산되기 시작했다. 자동 박피기, 슬라이서, 저온 건조기를 활용한 현대식 가공공장이 등장하면서, 고구마 간식의 형태가 급속도로 표준화되었다. 이전까지는 가정마다 간식 형태가 조금씩 달랐지만, 고구마말랭이의 등장 이후 간편성과 유통성이 우선되면서 ‘찧어서 말리는’ 고구마 간식은 점차 자취를 감췄다.
게다가 소비자의 기호가 바뀐 것도 영향을 미쳤다. 현대인은 바삭하거나 쫀득한 식감을 선호하고, 담백한 맛보다는 자극적인 단맛이나 향을 더 선호한다. 충청도식 고구마 간식은 자연 그대로의 식감과 맛을 살리다 보니, 현대의 입맛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또한 복잡한 제조 과정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삶고, 찧고, 모양을 만들고, 그늘에서 말리고, 다시 구워 먹는 수작업의 연속은 오늘날 바쁜 일상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 고구마 간식은 단지 음식이 아니라, 충청도 농촌이 가진 자급자족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결과물이었다. 전기가 없던 시절, 냉장 보관이 불가능했던 시절, 음식은 ‘보존’이 곧 ‘생존’이었고, 고구마 간식은 그 지혜의 결과물이었다.
다시 돌아봐야 할 고구마 간식의 유산
오늘날에도 일부 충청도 농촌에서는 할머니들이 여전히 ‘고구마 찧이 간식’을 만들고 있다. 옛 방식을 기억하는 이들이 줄어들고 있지만, 간혹 지역 축제나 전통음식 체험장에서 이 간식이 소개되면, 방문객들은 “이게 진짜 고구마맛이다”라며 놀라워한다. 고구마 본연의 단맛, 손으로 빚은 질감, 불에 살짝 구웠을 때 나는 고소한 향은 인공적 가공식품에서는 얻을 수 없는 정직한 맛이다.
이제는 이 간식을 단순한 ‘옛날 음식’으로 보기보다, 현대에 맞는 방식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수제 고구마 바’ 형태로 조청을 살짝 입혀 고급 디저트로 만들거나, 도시 소비자들을 위한 스팀팩 고구마 간식 키트로 구성할 수도 있다. 또한 학교 급식이나 지역 식문화 체험 교육의 자료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고구마말랭이는 훌륭한 간식이지만, 그 이전의 간식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말랭이도 존재하는 것이다. 찧고, 굳히고, 말리고, 구워 먹었던 충청도 사람들의 손끝에는 자연을 대하는 태도와 절약의 철학,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지혜가 담겨 있었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단지 먹는 것이 아니라, 문화로써 다시 기억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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