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조각의 떡에 담긴 고장의 자존심
명절이나 잔칫날, 혹은 집안 대소사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떡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떡 한 조각에는 조상의 손맛, 계절의 풍요, 그리고 지역의 고유한 정서가 함께 담겨 있다. 그중에서도 ‘단호박떡’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며 트렌디한 전통 간식으로 떠올랐지만, 사실 이 떡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히 정리된 바가 없다.
전남 고흥에서는 오래전부터 단호박을 주재료로 한 떡을 만들어왔다.
고흥군 도덕면, 풍양면 일대에서는 매년 가을마다 수확한 늙은호박으로 반죽을 만들어 찌거나 삶아 먹는 문화가 있었으며, 이를 지역 어르신들은 ‘호박시루떡’ 혹은 ‘단호박절편’이라 불렀다. 그러나 최근 수도권을 중심으로 퍼진 단호박떡은 포장 방식도 다르고, 사용하는 재료나 식감도 차별화되어 있다. 이처럼 똑같은 이름을 가진 떡이 지역마다 전혀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단호박떡’이라는 이름 속에는 단순한 식재료의 조합을 넘어서, 지역과 지역 사이의 전통 계승, 음식 문화의 정체성, 그리고 현대인의 입맛에 맞춰 변화해가는 과정을 모두 담고 있다. 이 글에서는 전라남도 고흥이 주장하는 단호박떡의 ‘원조’ 논리를 시작으로, 타 지역과의 차이점, 전통 떡이 현대화되는 과정을 통해 벌어지는 문화적 오해와 논쟁까지 자세히 들여다본다.
고흥에서 시작된 단호박떡의 원형
전라남도 고흥은 기후와 토양 조건 덕분에 늙은호박 재배가 활발한 지역 중 하나다. 고흥의 호박은 크기가 크고 수분 함량이 적어, 떡 재료로 사용했을 때 쫀득한 질감을 내는 데에 적합하다. 지역 어르신들에 따르면, 고흥에서는 예부터 가을 수확이 끝나면 삶은 늙은호박을 으깨 찹쌀가루나 멥쌀가루와 섞어 시루에 찐 호박떡을 해 먹는 것이 연례행사처럼 여겨졌다. 여기에 콩고물이나 팥고물을 얹기도 했고, 일부 마을에서는 생강즙이나 계피가루를 약간 넣어 향을 더했다.
고흥 단호박떡의 특징은 ‘단순하지만 정직한 맛’에 있다. 인공적인 단맛이 아닌, 호박 자체의 단맛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설탕이나 꿀은 거의 넣지 않는다. 반죽에는 물 대신 삶은 호박즙을 사용하는데, 이는 호박의 향과 색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한 방법이다. 찜솥에서 갓 쪄낸 호박떡은 특유의 노란빛과 고소한 향이 살아 있으며, 식었을 때에도 딱딱해지지 않아 어르신들에게 특히 사랑받았다.
이처럼 고흥 지역에서는 단호박을 주재료로 한 떡이 수십 년간 명절 음식으로 자리잡고 있었지만, 정작 이 떡을 ‘단호박떡’이라는 이름으로 상품화하거나 외부에 널리 알리는 데에는 다소 소극적이었다. 반면 수도권에서는 비슷한 떡이 건강 간식이라는 명목으로 프랜차이즈 떡집이나 백화점에 등장하면서 ‘단호박떡’이라는 명칭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이 지점에서 고흥 주민들과 다른 지역 간의 ‘원조 논쟁’이 조용히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지역마다 다른 단호박떡의 형태와 철학
단호박떡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지역마다 형태와 조리법이 조금씩 달라졌다. 예를 들어 서울·경기 지역에서는 얇고 쫀득한 절편 형태의 단호박떡이 유행했다. 여기에 단호박 앙금을 넣거나, 단호박 무스를 첨가해 풍미를 강화한 제품도 많다. 일부 프리미엄 떡집에서는 견과류를 넣은 ‘고급형 단호박떡’을 선보이며 젊은 소비자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반면 강원도 지역에서는 쑥이나 곤드레 같은 산나물과 혼합한 복합 떡 형태의 단호박떡이 만들어졌다. 색상은 고흥보다 탁하지만, 향이 더 강하고 식이섬유 함량도 높아 ‘건강 떡’으로 분류된다. 충청도 일대에서는 말린 단호박을 우려낸 물을 반죽에 섞거나, 말랭이 형태의 호박을 고명처럼 올리는 방식이 주를 이룬다. 전통 떡이라기보다는 현대적인 변형 떡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처럼 지역마다 단호박떡의 재료와 조리방식, 모양, 심지어 맛의 방향성까지 다르다는 것은 단순한 ‘레시피 차이’로만 설명할 수 없다. 떡은 그 지역의 식재료, 기후, 풍습, 기호가 모두 녹아든 문화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고흥에서 단호박떡은 '가을의 상징'이자 '자연 그대로의 맛'을 살리는 음식이라면, 수도권에서는 ‘고급스러운 간식’ 혹은 ‘건강 디저트’로 해석된다. 이 차이는 원조 논쟁보다 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바로 ‘어떤 떡이 진짜 단호박떡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떡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기억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떡을 통해 지역과 세대가 연결될 수 있을까
고흥이 단호박떡의 원조라는 주장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다. 오랜 시간 지역 주민들이 계절마다 만들어 먹어온 전통 방식, 자연 그대로의 재료 사용, 가족 단위로 이어져 내려온 손맛까지 모두 그 뿌리를 증명해준다. 그러나 오늘날의 떡 소비 환경은 이런 전통에 익숙하지 않다. 유통의 편의성, 시각적인 아름다움, 건강 트렌드에 맞춘 재료 조합이 우선시되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전통 떡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맥락의 전달’이다. 단호박떡이 고흥에서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고, 어떤 의미로 먹어졌는지를 함께 전달할 수 있다면, 소비자는 단순히 맛있는 떡을 넘어 ‘이야기가 있는 음식’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지역을 이해하고, 문화를 존중하며, 세대 간의 연결을 가능하게 만든다.
고흥의 단호박떡은 그 자체로 충분히 훌륭한 음식이다. 다만 우리가 그 가치를 느끼기 위해선 단순히 먹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이 만들어지는 배경과 철학을 함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떡 한 조각에도 지역의 자연과 사람, 시간과 계절이 녹아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간식을 넘어 하나의 문화가 된다. 단호박떡이 다시 각광받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그 문화의 본래 모습을 되살리고 지켜낼 수 있는 중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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