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들판 사이, 여름 떡이 자라던 섬의 기억
제주도의 서쪽 끝, 협재 해변 너머로 떠 있는 작은 섬 비양도. 이 조용한 섬마을은 과거 해녀들이 많이 거주하던 마을이자, 해초와 바다 식재료로 이루어진 독특한 식문화를 간직한 공간이었다. 여름이면 이 마을의 여성들은 아침 일찍 바다로 나가 해조류를 채취했고, 오후에는 그 재료를 활용해 가족들을 위한 음식을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여름에만 빚던 특별한 간식이 있었다. 바로 ‘톳반죽 떡’이다.
톳은 제주 해안에서 자라는 대표적인 해조류로, 특히 비양도 인근에서는 물살이 빠르고 수온이 일정해 질 좋은 톳이 자란다. 이 지역의 해녀들은 톳을 채취해 말리거나 무침으로 만들어 먹는 데 그치지 않고, 떡의 반죽 재료로도 활용했다. 일반적인 찹쌀가루에 삶은 톳을 잘게 썰어 넣고 반죽해 빚은 이 떡은, 바다의 향과 여름의 건강함을 동시에 담고 있는 특별한 여름 간식이었다.
이 톳떡은 뜨거운 찜기에서 익히면 검푸른 반죽이 윤기 있게 올라오고, 바다 냄새가 은은하게 피어오르며, 제주 해녀들의 노동과 지혜가 함께 담긴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간식이 되었다. 톳의 생산과 유통 방식이 변하면서, 떡 반죽에 톳을 사용하는 전통은 점차 잊혀졌고, 관광 중심의 음식들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 떡은 단순한 지역 음식이 아니라, 제주 여성들의 삶과 자연을 담은 소중한 기록이며, 다시 조명받아야 할 전통 음식 문화의 한 갈래다.
톳과 떡, 바다와 반죽이 만나는 조리법
톳반죽 떡의 핵심은 무엇보다 바다에서 건진 톳이다. 채취한 톳은 깨끗이 씻어 소금기를 제거하고, 살짝 데쳐낸 후 잘게 썰어 반죽에 섞는다. 이때 사용하는 반죽은 보통 찹쌀가루와 멥쌀가루를 7:3 비율로 섞어 사용하며, 물 대신 톳 삶은 물을 소량 넣어 톳의 향을 살렸다. 반죽은 부드러우면서도 질척이지 않게 만들어야 하며, 이 과정을 마을 어르신들은 감으로 조절했다.
속재료는 딱히 넣지 않는 것이 전통이지만, 때에 따라 달콤한 콩고물이나 들깨가루를 약간 섞기도 했다. 톳의 향이 강해 자칫 비린 맛이 날 수 있기 때문에, 일부 가정에서는 깨소금을 뿌려 익힌 떡을 식히는 방식으로 중화시켰다. 찜기에서 20분 정도 찌면 완성되며, 떡 표면은 은은한 바다색과 함께 반들반들한 윤기를 띤다.
이 떡의 가장 큰 특징은 해조류 특유의 식감이다. 일반적인 떡보다 덜 쫀득하면서도 오히려 씹을수록 고소하고 담백하다. 거기에 톳이 가진 해조 특유의 철분 향과 바다 내음이 입안에서 은은하게 퍼진다. 제주 바람과 맞닿은 듯한 이맛은 단순한 떡이 아니라 계절과 지역의 공기가 함께 스며든 음식으로 여겨졌다.
특히 톳은 칼슘과 철분이 풍부하고 섬유질이 많아, 더위로 지친 여름철에 건강 간식으로 손꼽혔다. 비양도에서는 이 떡을 빚는 일이 단순한 음식 준비를 넘어, 어머니와 딸, 이웃이 함께 모여 만드는 일종의 공동체 행위로 자리했다. 떡을 찌는 동안 서로 삶을 나누고, 익어가는 향기에 기대어 짧은 여름을 버텨내던 이야기들이 함께 무르익었다.
사라진 이유와 다시 조명할 가치
톳반죽 떡은 지금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로, 톳을 반죽 재료로 사용하기까지의 손질이 번거롭고 까다롭다. 생톳을 데치고 썰고 물기를 짜내는 과정은 노동력이 많이 들어가며, 빠르게 조리되는 현대식 떡 생산 공정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둘째, 해조류 특유의 향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점차 가정에서도 만들어지지 않게 되었다.
셋째, 관광 중심으로 변화한 제주 식문화에서는 톳을 주 재료로 한 간식이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고급 디저트나 시각적으로 화려한 떡이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단순하고 투박한 모양의 톳떡은 외면받기 시작했다. 특히 비양도처럼 작은 마을에서는 떡을 만드는 전통 자체가 끊기며, 관련 기술도 빠르게 사라졌다.
그러나 이 떡은 단순한 옛날 음식이 아니라, 지금도 가치 있는 지역 자산이다. 톳은 건강 식품으로 재조명받고 있으며, 천연 재료로 만든 떡에 대한 관심도 다시 높아지고 있다. 여기에 제주 고유의 재료와 전통을 활용한 슬로우푸드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이런 음식을 복원하려는 시도도 가능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톳을 분말로 가공해 반죽에 섞는 방식이나, 현대식 스팀 오븐을 활용한 조리로 번거로움을 줄이는 식의 재해석이 가능하다. 더 나아가 제주 체험형 관광 콘텐츠로 연결한다면, 톳반죽 떡 만들기 체험은 매우 독특한 지역 특산 프로그램이 될 수 있다. 바다와 산, 사람과 떡이 만나는 이 음식은 단순한 ‘맛’을 넘어 ‘경험’으로 승화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다.
제주 여름의 기억을 다시 부르는 떡
톳반죽 떡은 제주 여름의 공기와 바다, 사람들의 손끝이 만들어낸 정성의 결정체였다. 작고 소박하지만, 그 속에는 자연의 건강함과 공동체의 따뜻함, 그리고 계절의 흐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한때는 매년 여름마다 마을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이 떡이, 지금은 박물관에서도 보기 어려운 전통이 되었다는 사실은 안타깝다.
그러나 사라졌다고 끝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다시 관심을 두고, 기억하고, 기록하고, 다시 만들어보려는 의지만 있다면 이 떡은 다시 우리의 식탁 위에 오를 수 있다. 단지 옛 음식을 복원하는 차원이 아니라, 지역이 가진 독창성을 보존하고,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식문화로 발전시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제주의 바람을 맞으며 해녀들이 건져 올린 톳으로 만든 떡. 그 떡은 단순한 식재료의 결합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조화, 계절과 생활의 감각이 하나로 어우러진 진짜 제주다운 음식이었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떡의 가치를 알고, 비양도의 여름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전통 간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상북도 청도 돌담마을에서 겨울마다 빚던 감껍질 찰떡, 말린 감의 숨은 쓰임새 (0) | 2025.07.15 |
---|---|
충청 내륙 마을에서 명절마다 구웠던 꿀조청 달고나 떡, 숯불 위에서 피어오른 기억 (0) | 2025.07.15 |
강릉 산간 마을에서 눈 오는 날 구워 먹던 메밀껍질 화덕떡, 사라진 겨울 손난로 간식 (0) | 2025.07.14 |
전북 고창 갯벌 마을에서 겨울마다 만들던 굴껍질 숯떡, 바닷바람에 익힌 간식의 비밀 (0) | 2025.07.14 |
충남 금산 인삼밭 옆 작은 마을에서 먹던 인삼조청절편, 사라진 보약 떡의 기억 (0) | 2025.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