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선 살 수 없는 단맛, 외갓집 조청 이야기
도시에 살면서 우리는 단맛을 쉽게 접한다. 설탕, 물엿, 시럽은 편의점에서도 살 수 있고, 다양한 가공 식품에는 당분이 넘쳐난다. 그러나 그 단맛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질문은 잘 하지 않는다. 필자가 충청도 외갓집에서 처음 조청을 만든 날, 그 단맛은 단순한 ‘맛’이 아니라 손과 시간, 기다림이 섞인 감동이었다.
충청도 시골의 겨울은 조용하고 길다. 농한기라서 밭일은 줄지만, 그 대신 마을 어르신들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방식으로 저장 음식이나 간식, 전통 조미료를 손수 만들어 둔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조청’이다. 조청은 단맛을 내는 전통 수단이자, 약으로도 쓰였던 귀한 음식이다. 그런데 이 조청을 만들기 위해선 반드시 ‘엿기름’이라는 특별한 재료가 필요하다.
엿기름은 그 자체로도 만들기 까다롭지만, 조청으로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은 무려 2~3일에 걸쳐야 한다. 오늘날처럼 재료만 사서 끓이는 방식이 아닌, 모든 것을 손으로 준비하고 온도와 시간에 귀를 기울이며 만들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외갓집에서 배운 그 조청 만들기의 전 과정을, 당시의 기억과 함께 풀어보려 한다.
엿기름 만들기: 보리의 싹과 기다림의 기술
조청의 기본이 되는 엿기름은 말 그대로 엿을 만들기 위한 발아보리다. 충청도 외갓집에서는 정월 지나 겨울이 깊어갈 무렵, 보리를 불려 싹을 틔우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먼저 며칠 전부터 준비해둔 햅보리를 큰 대야에 담고 깨끗한 물에 불린다. 물은 보리를 완전히 덮을 정도로 붓고, 하루에서 이틀 정도 실온에서 담가둔다. 보리가 손으로 눌렀을 때 딱딱함이 사라질 정도가 되면 꺼내어 베자루에 싸서 따뜻한 방 안에 둔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 보리에서 작고 연한 싹이 나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싹의 길이와 상태다. 너무 길면 쓰고, 너무 짧으면 엿기름 효소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보통 싹의 길이가 보리알과 같거나 약간 짧을 때가 적당하다. 이렇게 발아시킨 보리를 햇볕에 말려 건조시키고, 절구나 방앗간에서 굵게 빻으면 ‘엿기름가루’가 완성된다.
외갓집에서는 이 과정을 엄격하게 지켰다. 엿기름은 엿이나 조청의 맛뿐 아니라 품질을 결정하는 핵심 재료이기 때문에, 단 한 번의 실패도 용납되지 않았다. 말리는 날씨도, 싹을 틔우는 방의 온도도 세심히 관찰해야 했고, 보리가 상하거나 곰팡이가 피면 전량 버렸다. 이렇게 공들여 만든 엿기름은 그 자체로도 은은한 단맛이 느껴졌고, 손으로 한 줌 쥐었을 때 고소한 향이 났다.
조청 만들기: 끓이지 않고, 기다리는 단맛의 정수
엿기름을 준비한 뒤 본격적으로 조청을 만들기 위해서는 찹쌀이나 멥쌀을 푹 고아야 한다. 외갓집에서는 쌀을 푹 삶아 죽처럼 만든 뒤, 여기에 엿기름가루를 풀어넣는다. 중요한 점은 엿기름은 절대 끓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온도는 손을 넣었을 때 ‘약간 따뜻하다’고 느껴지는 정도인 약 60도 이하를 유지해야 한다.
이 상태로 6~8시간 이상 두면 신기하게도 죽처럼 탁했던 쌀죽이 맑은 물처럼 분리되기 시작한다. 엿기름 속 효소가 작용해 전분을 당으로 바꾸는 ‘당화’ 과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는 이 과정을 “단물이 빠진다”고 표현하셨고, 한 시간마다 국자로 살살 저어가며 상태를 확인하셨다. 색은 황금빛으로 변하고, 맑은 감주 같은 물이 위에 뜨기 시작하면 체에 걸러낸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걸러낸 당화액을 다시 솥에 넣고 아주 약한 불에서 서서히 졸인다. 시간은 5시간 이상 걸리고, 주기적으로 저어야 눌어붙지 않는다. 불 조절을 못 하면 냄새가 변하고, 색이 탁해진다. 조청이 완성되면 끈적하면서도 바닥이 보일 정도로 졸아든다. 손가락에 묻혀 입에 넣었을 때 단맛이 서서히 퍼지고, 인위적인 당이 아닌 부드럽고 깊은 단맛이 느껴진다면 성공이다.
이렇게 만든 조청은 보관성이 높아, 외갓집에서는 유리병에 담아 두고 1년 내내 쓰셨다. 떡에 발라 먹고, 된장찌개에 한 숟갈 넣으면 감칠맛이 살아나며, 겨울에는 따뜻한 물에 풀어 약처럼 마시기도 했다. 단순한 당이 아니라, 살림의 핵심이었다.
사라져가는 손의 기억, 조청은 다시 배워야 한다
이제는 엿기름을 직접 만들어 조청을 만드는 집을 찾기 어렵다. 마트나 온라인 쇼핑몰에서 시럽을 구입하면 간편하고, 그 맛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외갓집에서 만든 조청은 그런 시럽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음식이다. 맛은 물론이고, 그 조청을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이 품고 있는 시간과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조청을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단맛을 얻기 위한 수고’가 아니라, 자연과 식물, 사람과 계절을 조화롭게 이어가는 행위였다. 쌀과 보리, 물, 불, 시간, 손이 모두 어우러졌을 때 비로소 조청이라는 단맛이 태어난다. 외할머니는 늘 “조청은 손이 말을 알아야 돼”라고 하셨다. 물을 붓는 양도, 불 조절도, 효소가 작동하는 온도도 모두 감각으로 익히는 것이었다.
필자가 이제 성인이 되어 외갓집을 다시 찾아 조청을 만들려 했을 때, 외할머니는 이미 그 손의 감각을 많이 잃으신 상태였다. 하지만 그 과정을 함께 되살리고, 손을 잡고 끓이고, 젓고, 졸이며 다시 이어가는 시간은 그 자체로 너무 소중했다. 조청은 이제 잊혀져 가는 손맛이 되었지만, 여전히 되살릴 수 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맛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기억하고, 전하고, 다시 해보는 것이다. 조청은 그 자체로 한국의 전통이며, 삶의 방식이자 문화다. 단지 ‘단맛’이 아니라, 사람의 손과 기다림이 빚어낸 정직한 음식이다. 지금 잊히기 전에, 누군가 다시 배우고 이어가야 한다. 그 첫걸음이 바로 기억이고, 기록이며,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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