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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간식

전북 임실에서 대보름 직전 만들던 팥깍지 찹쌀떡, 알맹이보다 껍질이 귀했던 이유

알맹이보다 껍질이 귀했던 이유

전라북도 임실의 한 산골 마을에서는 대보름을 앞둔 음력 정월 초부터 바삐 떡을 준비하곤 했다.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팥떡이라면 붉은 팥알을 삶아 곱게 갈아 고물로 입히거나, 반죽에 섞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는 남다른 방식으로 떡을 만들었다. 팥의 ‘알맹이’가 아니라 ‘껍질’만을 모아 떡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팥깍지 찹쌀떡’이다.

전북 임실에서 대보름 직전 만들던 팥깍지 찹쌀떡

 

이 떡은 오랜 가난의 흔적이자, 절기 음식에 담긴 지혜였다. 알맹이는 팔아 생계를 잇고, 껍질은 삶아내어 가족끼리 떡을 해 먹는 풍습은 절약과 공동체 정신이 깊게 배어 있던 시절을 반영한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버려질 재료를 알뜰히 활용한 음식이지만, 당시엔 그것이야말로 '진짜 귀한 음식'이었다.

대보름은 단지 부럼을 깨무는 날만이 아니었다. 보름 전부터 집마다 떡을 준비하고, 마을 어르신들에게 나누며 액운을 막고 복을 비는 전통이 있었다. 이 팥깍지 찹쌀떡은 그런 의미에서 '가난해도 품격 있게 떡 한 점은 내놓는 마을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떡 한 판에 담긴 향과 손맛, 그리고 껍질을 알뜰히 모은 정성은 무엇보다도 따뜻했다.

팥깍지가 주인공이 되는 순간

팥깍지는 팥을 삶아 으깨는 과정에서 나오는 껍질이다. 일반적으로는 팥앙금이나 팥죽을 만들기 위해 체에 걸러낸 후 버려지는 부분이다. 하지만 임실에서는 오히려 이 껍질을 말리지 않고 따뜻할 때 그대로 모아 두었다. 이 팥깍지는 얇고 질기지 않으며, 적당히 수분이 남아 있어 쫀득하게 재사용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마을 어르신들은 그걸 마르기 전에 쪄낸 찹쌀떡 위에 고물처럼 묻히기도 하고, 찹쌀반죽에 아예 섞어 같이 쪄내기도 했다.

특히 찹쌀반죽에 팥깍지를 넣고 반죽하는 방식은, 팥의 색감과 향이 은은하게 배면서도 껍질 특유의 식감이 더해져 이색적인 맛을 만든다. 팥알의 고운 식감 대신, 오히려 오도독 씹히는 팥껍질의 존재감이 살아 있다. 이 방식은 팥고물이 귀하거나 아예 없는 가정에서도 떡을 즐기기 위한 실용적 대안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임실 지역만의 독특한 떡 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

떡을 찐 후 껍질 고물을 위에 더 얹거나, 참기름을 살짝 발라 굳지 않게 보관하던 방식은 오늘날에도 시도해볼 만하다. 보관성은 물론, 비건 식단에도 어울리는 전통 간식이 되며, 건강 간식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 일부 농촌 체험 마을에서는 이 팥깍지 떡을 체험형 상품으로 개발해 관광객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절기 음식으로서의 의미와 공동체 문화

팥은 대보름과 밀접한 의미를 가진 식재료다. 예로부터 붉은색은 액운을 쫓는 색으로 여겨졌고, 팥으로 만든 음식은 집안의 부정을 막아주는 부적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모든 가정이 팥을 넉넉하게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산간 마을이나 어려운 집안에서는 팥알은 팔고, 그 껍질만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팥깍지 떡은 단순한 절약이 아닌, ‘남은 것으로도 마음을 담는 음식’이라는 점에서 깊은 정서적 가치를 지닌다.

임실의 일부 마을에서는 이 떡을 해놓고 한 접시씩 이웃집에 돌리는 풍습이 남아 있었다. 마을 어귀를 돌며 “팥깍지 떡 한 점 놓고 갑니다” 하고 인사하던 풍경은, 단순히 간식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복을 빌고 건강을 기원하는 행위였다. 이웃과 나누는 음식이기에 더 신경 써서 떡을 찌고, 껍질을 너무 굵지 않게 다듬고, 되도록 색이 곱게 나오도록 조리하곤 했다. 음식은 곧 체면이었고, 정성이었다.

또한 이 떡은 ‘떡판’이라 불리는 널판지에 넓게 펴서 찐 후, 말린 후 조청이나 꿀에 찍어 먹기도 했다. 말린 팥깍지 찹쌀떡은 보관이 쉬워 새벽 농사철 간식이나 이동 중 허기를 달래는 떡으로도 사랑받았다. 즉, 이 떡 하나가 계절, 공동체, 경제적 사정, 건강 등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다시 꺼내보는 껍질의 가치

팥깍지는 지금의 식문화에서는 주로 폐기물로 분류된다. 많은 현대인은 팥을 고운 고물이나 앙금으로만 인식하고, 껍질은 식감이 거칠다며 외면한다. 그러나 전북 임실에서는 그 껍질조차 음식이 되었고, 심지어 이웃과 나누는 ‘소중한 떡’의 주재료가 되었다. 이러한 발상은 단순한 절약을 넘어선 철학이다. 버려질 것에서 의미를 찾고, 부족함 속에서 정성을 나눈 사람들의 문화가 그 안에 있다.

현대에 이 팥깍지 찹쌀떡을 재현한다면, 환경적 의미에서도 큰 가치가 있다.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고, 농산물의 모든 부분을 활용하려는 움직임과도 닿아 있다. 또 하나의 관점은 ‘낮은 재료로 고운 마음을 담는 법’을 전하는 교육적 의미이다. 음식은 단지 입에 넣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태도를 담는 그릇이다.

언젠가 다시 대보름을 맞이하게 된다면, 붉은 팥고물 대신 은은한 팥껍질 향이 배인 떡 한 점을 꺼내보자. 알맹이보다 껍질이 귀하던 시절의 따뜻한 마음이, 지금 우리의 식탁에 다시 피어오를지도 모른다.

그 시절 팥깍지 찹쌀떡은 단순한 절약의 산물이 아니라, 마을 여인들이 오랜 시간을 들여 함께 만드는 공동 노동과 돌봄의 상징이기도 했다. 떡을 찌기 전, 삶은 팥을 베보자기에 싸서 꾹꾹 짜던 손길, 고슬하게 삶아진 팥깍지를 양푼에 담아 고르게 섞던 움직임, 떡판 위에 한 줄 한 줄 정성껏 놓아가며 손바닥으로 꾹 눌러 다듬던 풍경은 겨울 끝자락의 고요한 일상이자 따스한 협업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떡은 혼자 먹기보다는 꼭 몇 점은 접시에 담아 “건넌집에도 좀 드려라” 하며 아이들 손에 쥐어 보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팥깍지 찹쌀떡에는 음양 오행 사상의 붉은색 의미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는 점이다. 빨간 팥은 잡귀를 막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설날이나 정월 대보름 같은 명절에는 반드시 팥이 들어간 떡이나 밥을 먹었다. 하지만 알맹이를 다 걸러낸 껍질이라도 붉은 기운이 충분히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 떡도 엄연히 ‘잡귀를 물리치는 음식’으로 여겨졌다. 오히려 마을 노인들 중에는 “팥깍지 떡이 더 효과 있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 말은 미신이라기보다는 남은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던 삶의 태도에 가까웠다.

요즘처럼 음식의 겉모습이나 고급 재료만을 따지는 시대에는, 팥깍지 찹쌀떡이 낯설거나 심지어 궁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사회에는 음식 자원을 더 알차게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 전통의 의미를 되살리려는 이들이 존재한다. 특히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나 농산물 가공 체험을 운영하는 로컬푸드 마을에서는 이러한 ‘재료 절약형 전통 떡’을 교육적, 환경적 가치를 담은 음식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초등학교에서는 팥깍지 찹쌀떡 만들기를 체험수업으로 진행하며, 아이들에게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의 중요성과 조상의 지혜를 함께 전달하는 활동으로 연계되기도 한다.

언뜻 단순해 보이는 이 떡 한 조각에는, 먹고 남긴 것을 다시 살려내는 절약 정신, 남은 것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의 따뜻한 정서, 그리고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도 정성을 다했던 어머니들의 손맛이 모두 담겨 있다. 마치 껍질 안에 감춰진 열매처럼, 팥깍지 떡은 오늘날에도 그 속에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니 이 떡을 다시 꺼내들어 식탁에 올릴 때, 단순히 '옛날 간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삶을 잊고 있었는지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